일본의 복지형신탁 수요와 전문직의 대응
1. 재산승계를 넘어 생활을 지원하는 신탁
일본에서 민사신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배경에는 초고령사회의 현실이 있다. 치매 등으로 스스로 재산을 관리하기 어려운 고령자가 늘고, 건강한 사람도 간병과 의료비, 소비자피해, 사망 후 상속분쟁을 염려한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둔 부모에게는 ‘부모 사후’ 자녀의 생활과 재산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관리할 것인지가 더욱 절박한 문제이다. 여기서 민사신탁은 신탁업자가 영업으로 인수하는 상사신탁과 구별되는, 신탁업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신탁을 말한다. 실무에서는 가족 등 개인이 수탁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수요에 대응하는 신탁은 재산의 증식이나 절세보다 현재의 재산을 보전하고, 이를 수익자의 생활지원과 복지증진에 사용하며, 남은 재산을 다음 세대에 안정적으로 승계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일본에서 이를 흔히 ‘복지형신탁’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복지형신탁은 독립된 법정 유형이라기보다 신탁의 목적과 기능을 나타내는 말이다. 일본 실무에서는 주로 민사신탁의 방식으로 설정되며, 위탁자나 수익자의 고령·장애·질병 등으로 지속적인 생활지원이 필요한 경우 신탁재산을 생활비·의료비·간병비·주거비 등에 사용하도록 설계한 신탁을 넓게 가리킨다. 따라서 성패는 신탁재산의 규모나 복잡한 절세기법보다 수익자의 생활을 이해하고 장기간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수탁자를 확보하는 데 달려 있다.
그런데 일본 실무가 부딪힌 가장 큰 제약은 수탁자의 공급이었다. 일본에서도 민사신탁에 대한 수요는 커졌지만, 수탁자 후보를 배우자·자녀·며느리·조카 등 친족 중에서 찾는 관행이 계속되고 있다. 신탁의 구조는 정교해졌지만 실제로 그 구조를 책임지고 작동시킬 사람은 매우 좁은 범위의 친족에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복지형신탁의 문제는 신탁계약을 만들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 계약을 수년 또는 수십 년 동안 성실하게 실행할 사람을 구할 수 있느냐에 있다.
2. 가족에 대한 신뢰와 수탁자로서의 적합성은 다르다 — 일본 실무가 보여준 사례
일본의 한 사법서사(우리나라의 법무사에 해당)가 상담한 사례는 이러한 문제를 잘 보여 준다. 위탁자는 둘째 며느리를 수탁자로 신뢰하였지만, 그 며느리는 직장 경험이 없고 돈 관리와 계산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후임수탁자로 예정된 손녀는 의과대학생이었고, 가족조차 그 적격성을 걱정하였다. 다른 사례에서는 위탁자의 장남, 배우자의 조카 또는 장녀가 수탁자로 정해졌다. 가족관계상의 신뢰가 곧바로 신탁사무를 처리할 능력과 장기간 책임을 감당할 의사까지 보증하지는 않는다.
수탁자에게 필요한 것은 막연한 신뢰만이 아니다. 신탁재산의 내용과 자산상태를 파악하고 재산목록과 장부를 작성하며, 세무신고와 수익자·관계인에 대한 보고를 처리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위탁자 및 수익자와의 관계, 이해상반의 유무, 직업과 경력, 신용과 재산관리 경험도 함께 살펴야 한다. 수탁자의 가족이 신탁부동산에 거주하거나 수탁자의 자녀가 신탁감독인(信託監督人)을 맡는 경우, 미성년자를 후임수탁자로 정한 경우에는 가족 내부의 이해관계가 수탁자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수탁자가 수익자의 임의후견인까지 겸하면 재산을 지출하는 사람과 그 지출을 필요로 하는 본인을 대리하는 사람이 같아져 이해상반이 더욱 선명해질 수 있다.
친족 수탁자가 언제나 부적합하다는 뜻은 아니다. 소규모 재산을 관리하면서 수익자의 일상생활을 세심하게 지원하는 일에는 가족이 가장 적합할 수 있다. 문제는 ‘가족이므로 믿을 수 있다’는 말이 적격성 심사를 대신하는 데 있다. 가족으로서 성실한지와 수탁자로서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질문이다. 복지형신탁에서는 수익자가 고령자나 장애인인 경우가 많아 스스로 수탁자를 감시하거나 책임을 묻기 어렵다. 그러므로 수탁자 선정 단계에서부터 능력·독립성·계속성·이해상반을 구체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3. 성년후견과 다른 두 사람만의 계약
일본의 법정후견에서는 가정재판소가 후견인의 직업·경력·자산상태 등을 고려하여 적임자를 선임한다. 친족 중에 적임자가 없으면 전문직후견인, 시민후견인 또는 법인을 제3자후견인으로 선임할 수도 있다. 선임 후에도 법원의 감독이 뒤따른다. 반면 민사신탁의 출발은 위탁자와 수탁자의 계약이다. 당사자가 마음에 드는 사람을 자유롭게 수탁자로 정할 수 있는 것은 장점이지만, 적격성을 걸러내는 외부 절차가 없다. 일본 실무에서는 이처럼 수탁자 선정과 감독이 당사자 내부에 맡겨지는 구조를 다소 비판적으로 ‘두 사람만의 밀실세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계약자유는 복지형신탁의 유연성을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취약점이 된다. 위탁자의 판단능력이 이미 저하된 상황에서 추정상속인들이 ‘어머니의 판단능력에는 문제가 없고, 문제가 생겨도 가족끼리 해결하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더라도 신탁 설정능력이나 수탁자 적격성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해관계가 있는 가족의 일치된 설명이 고령자의 의사를 대신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전문직은 의뢰인의 요구를 실현하는 계약서 작성자에 머물지 않고, 신탁을 설정해도 되는 상황인지와 후보자가 수탁자의 책임을 실제로 이행할 수 있는지를 독립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이 점에서 복지형신탁과 후견은 대체관계라기보다 기능을 나누어 결합할 제도이다. 신탁은 특정 재산의 관리와 급부에 강점이 있고, 후견은 판단능력이 저하된 본인의 법률행위와 신상보호를 지원한다. 신탁재산에서 요양비나 의료비를 지급하려면 수익자의 생활상태를 확인해야 하므로 두 영역은 현실에서 맞닿는다. 수탁자와 후견인의 역할을 구분하고, 필요한 경우 서로 견제하며 정보를 교환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한 사람이 두 지위를 겸한다면 편의만이 아니라 이해상반과 감독 공백을 먼저 점검할 필요가 있다.
4. 계약서 작성 이후가 전문직의 본래 업무
일본의 민사신탁 실무에 대한 더 뼈아픈 지적은 전문직의 지원이 계약서 작성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상담을 받아 계약서를 작성하고 보수를 받은 뒤 ‘위임사무 종료’로 처리한다면, 신탁이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는지는 전문직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수탁자가 장부를 제대로 작성하는지, 수익자의 생활 변화에 맞추어 급부가 이루어지는지, 신탁재산의 처분이나 수선이 필요한지, 수탁자와 가족 사이에 분쟁이 생기지는 않았는지를 확인하기 어렵다. 아무런 사후상담이 없다는 사실은 문제가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문제를 드러낼 통로가 없다는 뜻일 수도 있다.
신탁계약의 작성은 성년후견에서 후견개시 심판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도 운용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전문직의 역할은 첫째, 위탁자의 추상적인 바람을 실행 가능한 급부기준과 관리규칙으로 구체화하는 것이다. 둘째, 신탁이 존속하는 동안 정기적으로 장부와 재산목록을 확인하고, 수탁자의 의무 이행과 이해상반 거래를 점검해야 한다. 셋째, 수익자의 사망으로 수익권의 승계 문제가 발생하거나 수탁자의 교체가 필요한 경우 사무 인계와 권리관계를 정리해야 한다. 넷째, 신탁 종료와 잔여재산의 귀속, 계산의 승인과 등기·세무 처리를 지원해야 한다. 복지형신탁에서는 종료 후에도 수익자와 관계인의 보호·상담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따라서 전문직의 업무모델도 일회적인 계약서 작성 보수에서 지속적인 지원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정기점검, 회계검토, 수탁자 교육, 중요 처분에 대한 자문, 후임수탁자 선정과 업무 인계를 하나의 계속적 서비스로 구성할 수 있다. 변호사·사법서사·세무사·회계사·사회복지사와 금융기관이 각자의 전문영역을 나누되, 누가 전체 과정을 조정하고 책임지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전문직이 직접 수탁자가 되지 않더라도 신탁감독인·수익자대리인 또는 수탁자의 자문인으로 참여하여 가족 수탁자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
5. 2006년 일본 국회 부대결의 이후의 변화와 남은 과제
2006년 신탁법 개정 당시 일본 국회는 고령자와 장애인의 생활을 지원하는 복지형신탁에 관하여 변호사·사회복지법인·NPO법인 등이 수탁자로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폭넓게 검토하도록 부대결의를 하였다. 이후 금융청이 복지형신탁의 개념, 성년후견제도와의 관계, 수탁자의 역할과 사업의 지속 가능성 등을 검토하였지만, 전문직이나 복지법인이 일반적으로 수탁업무를 담당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개편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전문직의 역할이 확대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변호사·사법서사·세무사 등을 중심으로 민사신탁 관련 단체와 교육체계가 형성되었고, 전문직은 신탁계약의 설계, 수탁자 후보의 검토, 신탁감독인으로서의 수탁자 감독 또는 수익자대리인으로서의 수익자 권리 행사, 등기·세무 및 분쟁 예방 업무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즉 전문직의 참여는 주로 수탁자를 지원하고 감독하는 영역에서 확대되었다.
이러한 전문직 참여가 민간 차원에서 체계화된 사례로 민사신탁추진센터가 인정하는 ‘민사신탁사(民事信託士)’를 들 수 있다. 민사신탁사는 일정한 검정에 합격하여 등록한 변호사 또는 사법서사로서, 민사신탁에 관한 상담과 구조 설계, 신탁계약 체결 후의 등기 및 재산관리 지원, 신탁감독인으로서의 수탁자 감독 또는 수익자대리인으로서의 수익자 권리 행사 등의 역할을 담당한다. 특히 수익자대리인은 특정 수익자를 위하여 수익권에 관한 권리를 포괄적으로 행사함으로써 수익자를 보호한다. 그러나 민사신탁사라는 자격만으로 신탁업법상 수탁업무를 영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현재 민사신탁추진센터도 민사신탁사가 수탁자가 되는 것을 예정하고 있지 않다.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복지형신탁에 특화된 전문 수탁회사의 출현이다. ‘후쿠시신탁 주식회사’는 2022년 7월 22일 관리형 신탁회사로 등록하여 장애인·고령자의 생활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복지형신탁을 취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는 변호사·사법서사 또는 사회복지법인에 수탁자 자격을 폭넓게 개방한 결과가 아니라, 기존 신탁업법상 등록요건을 충족한 별도의 신탁회사가 출현한 것이다. 따라서 2006년 부대결의 이후 민사신탁사를 비롯한 전문직의 지원체계가 발전하고 전문 수탁자의 공급도 일정 부분 확대되었지만, 다양한 전문직과 비영리법인이 복지형신탁의 수탁자로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은 여전히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6. 일본의 경험이 주는 시사점
일본의 경험은 민사신탁의 활성화가 계약서의 보급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 수탁자 후보를 가족에게 한정한 채 계약기술만 고도화하면, 제도가 확산될수록 이해상반과 부실관리의 위험도 함께 커진다. 전문직이 부적합한 후보자를 알면서도 ‘가족이 동의했으니 괜찮다’며 계약을 완성하는 데 그친다면, 당장의 의뢰는 처리할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민사신탁에 대한 신뢰를 훼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개인신탁과 가족신탁을 논의할 때 누가 수탁자가 될 것인지, 수탁자의 적격성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확인할 것인지, 설정 후 누가 계속 감독하고 지원할 것인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 특히 복지형신탁은 재산관리와 생활지원이 결합되므로 법률가만으로 완결되기 어렵다. 전문수탁자를 중심으로 세무·회계·복지·의료·후견 전문가가 협력하고, 가족은 수익자의 생활정보와 의사를 전달하며, 신탁관리인 등이 수탁자의 업무를 감독하고 수익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우리 자본시장법은 일본과 달리 관리형 신탁업에 특화된 별도의 등록제도를 두지 않고, 신탁을 영업으로 인수하려면 금융투자업으로서 신탁업 인가와 자기자본·전문인력·물적 설비 등의 요건을 갖추도록 한다. 따라서 후쿠시신탁 주식회사와 같은 복지형 전문 수탁회사의 진입이 쉽지 않으므로, 업무범위를 제한한 관리형 신탁업의 별도 규율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복지형신탁이 지향하는 것은 재산의 효율적 운용만이 아니라 취약한 수익자가 자신의 삶을 안정적으로 이어 가도록 돕는 일이다. 그러므로 전문직의 책임도 좋은 계약서를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적합한 수탁자를 찾아내고, 전문조직이 수탁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며, 신탁의 존속부터 종료와 청산까지 책임 있게 관여해야 한다. 일본이 제기한 ‘수탁자층의 취약성’이라는 문제는 우리에게도 이미 현실적인 과제이다. 개인신탁의 다음 단계는 상품이나 계약서의 수를 늘리는 데 있지 않고, 수익자의 생활을 장기간 지탱할 전문수탁자와 지원체계를 마련하는 데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