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신탁과 미국 신탁의 차이

1. 신탁을 지배하는 자는 누구인가
신탁은 위탁자가 자신의 재산을 수탁자에게 이전하고, 수탁자로 하여금 수익자를 위하여 그 재산을 관리·처분하도록 하는 법률관계이다. 신탁의 출발점은 위탁자의 재산과 의사이다. 그렇다면 신탁이 설정된 후에도 위탁자는 자신이 설계한 신탁을 계속 지배할 수 있는가. 아니면 신탁재산의 이익을 누리는 수익자가 신탁의 운명을 결정하여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영국법과 미국법의 태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영국에서는 일단 신탁이 유효하게 설정되고 수익권이 확정되면, 신탁재산의 실질적인 이익을 보유한 수익자가 그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중시된다. 이에 비하여 미국에서는 위탁자가 자신의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하고 장래의 관리·승계 방법을 설계할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된다.
이러한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영국의 ‘Saunders v. Vautier 법리’와 미국의 철회 가능 신탁(Revocable Trust)이다. 전자가 수익자가 신탁재산에 대하여 가지는 권리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준칙이라면, 후자는 위탁자의 의사와 지배권을 중심으로 신탁관계를 재구성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2. Saunders v. Vautier 사건
「Saunders v. Vautier」는 1841년 영국 형평법원에서 선고된 판결이다. 사건의 발단은 유언에 따라 설정된 신탁이었다.
유언자 리처드 라이트(Richard Wright)는 2,000파운드 상당의 동인도회사 주식을 수탁자에게 맡기면서, 자신의 조카손자인 대니얼 라이트 보티어(Daniel Wright Vautier)를 위하여 그 배당금 등을 적립하도록 하였다. 유언에 따르면 수탁자는 보티어가 25세가 될 때까지 수익을 축적하고, 그가 25세에 이르면 주식과 그동안 축적된 수익을 모두 이전하여야 했다.
그런데 보티어는 당시 성년이 되는 21세에 도달하자, 25세까지 기다리지 않고 신탁재산 전부를 자신에게 이전해 달라고 청구하였다. 유언자가 정한 지급 시기보다 4년이나 이른 때였다. 따라서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단독 수익자가 완전한 행위능력을 갖추고 신탁재산 전부에 대한 확정적인 권리를 보유한 때도, 유언자가 정한 25세라는 지급 시기에 구속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법원은 보티어의 청구를 받아들였다. 수익자가 성년이고 완전한 행위능력을 가지며 신탁재산 전부에 대하여 절대적이고 확정적인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면, 수익자는 위탁자 또는 유언자의 의사에 반하더라도 수탁자에게 신탁재산의 이전을 청구하여 신탁을 조기에 종료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판결에서 형성된 준칙이 이른바 ‘Saunders 법리’이다. 이를 일반화하면, 모든 수익자가 완전한 행위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들이 합하여 신탁재산의 수익권 전부를 보유한 경우, 수익자 전원의 합의로 수탁자에게 신탁재산을 이전하도록 지시하고 신탁을 종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수익자가 한 명이면 그 수익자가 단독으로 행사할 수 있고, 수익자가 여러 명이면 신탁재산의 수익권 전부를 보유한 수익자 전원의 합의가 필요하다.
다만 이 법리는 모든 신탁에 무조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미성년자, 태아, 아직 확정되지 않은 수익자 또는 장래에 추가될 수 있는 수익자가 존재하거나, 수익권이 일정한 조건의 성취에 달리면 수익자들이 신탁재산 전부에 대하여 확정적인 권리를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현재의 수익자들만으로는 Saunders 법리에 따라 신탁을 종료시킬 수 없다.
3. Saunders 법리가 보여주는 영국 신탁의 구조
Saunders 법리의 중요성은 단순히 수익자가 신탁재산을 예정된 시기보다 일찍 받을 수 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법리는 신탁을 설정하고 그 틀을 만드는 자는 위탁자이지만, 설정된 신탁을 법적으로 집행하는 자는 수익자라는 영국 신탁법의 기본적인 관념을 보여준다.
위탁자는 신탁행위를 통하여 수탁자의 권한과 의무, 수익의 지급 시기 및 방법 등을 정할 수 있다. 그러나 위탁자의 의사가 언제까지나 신탁재산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신탁재산에 관한 모든 수익적 이익이 행위능력을 갖춘 수익자들에게 확정적으로 귀속되었다면, 수익자들은 자신들의 재산적 이익을 어떠한 방법으로 실현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위탁자가 정한 지급 시기나 관리 목적은 수익자 전원의 의사에 우선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Saunders 법리는 수익자의 재산권을 근거로 위탁자의 지속적인 지배를 제한하는 준칙이다. 영국에서 신탁은 원칙적으로 철회할 수 없다는 관념이 강조되고, 수탁자가 기본적으로 수익자에 대하여 신인 의무를 부담한다고 보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위탁자를 실질적인 소유자로 취급하고 수익자의 지배권을 전적으로 배제한다면, 그것이 과연 수익자를 위한 신탁인지, 아니면 위탁자가 재산의 소유와 지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외형만 신탁으로 만든 것인지가 문제 될 수 있다. 가장 신탁(sham trust)의 문제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다.
4. 미국의 철회 가능 신탁과 위탁자 중심의 신탁관
미국에서 널리 이용되는 철회 가능 신탁은 이와 다른 방향에서 발전하였다. 위탁자는 자신을 생전 수익자 또는 수탁자로 정하고, 신탁을 변경하거나 철회할 권한, 수익자를 지정·변경할 권한 등을 유보할 수 있다. 위탁자가 생존하는 동안에는 신탁재산을 사실상 계속 지배하면서, 사망 후에는 신탁재산이 유언 검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지정된 수익자에게 이전되도록 설계할 수 있다.
철회 가능 신탁이 존속하는 동안 수익자의 권리는 위탁자가 가진 철회권에 종속된다. 위탁자가 철회권을 행사하면 수익자의 지위 자체가 소멸할 수 있기 때문에, 위탁자 생전의 수익자는 확정적인 재산권자라기보다 장래의 기대를 하는 자에 가깝다. 이에 따라 미국의 통일 신탁법전(Uniform Trust Code)은 철회 가능 신탁에서 위탁자가 생존하고 행위능력을 가진 동안 수익자에 대한 수탁자의 의무가 위탁자의 권리에 종속되며, 수탁자의 의무도 위탁자에게만 부담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는 신탁이 유언 대용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는 미국의 현실을 반영한 정책적 선택이다. 위탁자의 지배권이 강하더라도 채권자 보호, 유류분에 상응하는 배우자 보호 및 사해행위 규율 등을 통하여 폐해를 방지할 수 있다면, 위탁자의 재산 관리 및 승계 설계를 폭넓게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5. 우리 신탁법 제99조와 Saunders 법리
우리 신탁법은 영국의 Saunders 법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탁법 제99조 제1항은 “위탁자와 수익자는 합의하여 언제든지 신탁을 종료할 수 있다”라고 규정한다. 영국법에서는 행위능력을 가진 수익자 전원이 신탁재산의 수익권 전부를 보유하면 위탁자의 동의 없이도 신탁을 종료시킬 수 있지만, 우리 법에서는 원칙적으로 위탁자와 수익자의 합의가 필요하다.
더욱이 신탁법 제99조 제4항은 신탁행위로 이와 달리 정할 수 있도록 한다. 따라서 신탁행위에서 위탁자와 수익자의 종료권을 제한하거나 별도의 종료 요건을 둘 수도 있다. 위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수익자 전원이 신탁을 종료할 수 있다는 Saunders 법리가 영국법에서 강제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과 대비된다.
다만 위탁자가 신탁이익 전부를 누리는 자익신탁에서는 위탁자 또는 그 상속인이 언제든지 신탁을 종료할 수 있다(신탁법 제99조 제2항). 이 경우에도 신탁행위로 달리 정할 수 있으므로, 우리 신탁법은 일률적으로 수익자 또는 위탁자 어느 한쪽을 우선하기보다 신탁행위에 의한 자치와 당사자 사이의 이해 조정을 중시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신탁행위 당시 예측하지 못한 특별한 사정이 발생하고, 신탁을 종료하는 것이 수익자의 이익에 적합함이 명백한 경우에는 법원에 신탁의 종료를 청구할 수 있다(신탁법 제100조). 그러나 이 제도는 수익자의 절대적인 재산권을 근거로 해 당연히 인정되는 Saunders 법리와 달리, 예측하지 못한 특별한 사정과 수익자 이익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요구한다.
결국 우리 법에서 수익자는 신탁재산의 이익을 향유하고 수탁자의 신탁 사무를 감독하는 핵심 당사자이지만, 수익자 전원의 합의만으로 언제나 위탁자의 신탁 설계를 무력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 신탁법은 영국법보다 위탁자의 신탁 설계 의사를 더 두텁게 존중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6. 우리나라 신탁 실무에 주는 시사점
첫째, 장기적인 재산 관리와 승계를 목적으로 신탁을 설계할 때는 위탁자, 수익자 및 수탁자 중 누가 어떠한 범위에서 신탁의 변경과 종료를 결정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정하여야 한다. 우리 신탁법 제99조 제4항은 신탁행위로 달리 정하는 것을 허용하므로, 종료권과 변경권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으면 위탁자가 의도한 장기적인 신탁 목적이 당사자의 합의에 따라 조기에 소멸할 수 있다. 실무적 팁으로 신탁계약서 작성 시 ‘위탁자 사후 수익자의 임의 해지권을 배제한다’라는 특약(제99조 제4항 활용)을 명시한다면 위탁자의 장기 승계 의지를 강제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위탁자에게 지나치게 광범위한 권한을 유보할 때는 신탁의 실질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위탁자가 신탁의 해지·변경, 수익자 지정, 신탁재산의 운용 및 처분을 사실상 전적으로 지배한다면, 사법상 신탁의 효력과는 별개로 도산격리, 채권자 보호 및 조세법상 소득·재산의 귀속을 판단할 때 위탁자를 실질적인 권리자로 평가할 가능성이 커진다. 따라서 위탁자 권한의 유보는 신탁 목적에 필요한 범위에서 정교하게 설계되어야 한다.
셋째, 유언대용신탁이나 복지형 신탁에서는 수익자의 조기 종료 요구와 위탁자의 장기적 보호 목적이 충돌할 수 있다. 고령자나 장애인인 수익자의 생활을 장기간 보장하거나 재산의 낭비를 방지하려는 신탁에서 수익자가 언제든지 신탁을 종료할 수 있다면 위탁자의 보호 목적은 달성되기 어렵다. 반대로 행위능력을 가진 수익자가 신탁재산 전부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위탁자의 사후적 지배에 영구히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한 지도 검토하여야 한다. Saunders 법리는 바로 이러한 충돌을 수익자의 재산권을 우선함으로써 해결한 것이다.
7. 위탁자의 설계와 수익자의 자유 사이에서
영국의 Saunders 법리와 미국의 철회 가능 신탁은 어느 제도가 더 우월한가의 문제가 아니다. 양자는 신탁에서 보호하여야 할 핵심 이익을 서로 다르게 설정한 결과이다. 영국법은 신탁재산의 이익이 확정적으로 귀속된 후에는 수익자가 그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중시하고, 미국법은 재산 관리와 사후 승계에 관한 위탁자의 자기 결정권을 중시한다.
Saunders 법리가 우리 신탁법에 직접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법리는 신탁의 본질을 돌아보게 한다. 위탁자는 신탁을 설정하고 그 목적과 틀을 만들지만, 신탁재산의 이익을 위하여 수탁자에게 의무 이행을 요구하는 자는 수익자이다. 위탁자의 지배권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수익자를 명목상의 존재로 만든다면, 신탁이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현대의 유언대용신탁, 복지형 신탁 및 자산관리 신탁에서는 위탁자가 일정한 권한을 유지하여야 할 현실적인 필요도 크다. 중요한 것은 위탁자의 권한을 인정할 것인지 부정할 것인지의 양자택일이 아니다. 신탁의 목적과 유형에 따라 위탁자의 신탁 설계 자유, 수익자의 재산적 자유 및 채권자 등 제3자의 이익 사이에 합리적인 경계를 설정하는 일이다.
185년 전에 선고된 Saunders v. Vautier 판결이 오늘날에도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판결은 신탁을 설계할 때 “위탁자가 무엇을 원하였는가”만을 물어서는 충분하지 않으며, “신탁재산의 이익은 누구에게 귀속되고, 최종적으로 누가 그 재산을 지배하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함께 던져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